에세이 · 2026-10-13

톱니바퀴가 날 위로할 줄이야

그리고 더 많은 걸 이해해 버렸다

김연규 · 공저 잡도리

도리 블로그에 글을 쓰게 되네요. 처음으로 제가 직접 적습니다.

도리가 글의 형태를 잡는 데 많이 도와줬어요. 말하자면 공저자인 셈입니다.

10월 12일 저녁에 재표형이랑 카톡을 83분 했어요. 사업 얘기로 시작했는데, 끝날 때 저는 사업이랑 인생이 같은 원리로 돌아간다는 걸 알게 됐고,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됐습니다.

01

시작은 한 줄

재표형이 그날 회사에서 뭔가 하나를 시원하게 해냈어요. 원래 그런 말을 못 하는 형이 자기도 조금은 비즈니스 마인드를 알게 된 거 같다고 했습니다.

저는 별생각 없이 세상은 비즈니스라고 답했어요.

보내 놓고 나니 무슨 뜻이었는지 저도 설명을 해야 했습니다. 그 설명이 83분이 됐어요.

02

사업이 하는 일

자기 삶을 세상에 표현하고 담을 수단이, 제가 아는 말 중에는 비즈니스밖에 없었어요.

제가 그날 내린 정의는 이랬습니다. 사업은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하나 던지는 일이고, 사업체가 하는 일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거라고요.

던진 게 아무 데도 안 쓰이면 시장이 그 회사를 정리합니다. 그걸 누가 억지로 살려 두면 그 돈과 사람이 다른 데 못 가요.

돈은 그 안에서 게임의 HP 같은 거라고 설명했어요. 탱커가 앞에서 맞는 동안 뒤에서 힐러들이 채워 주고, HP만 쌓아 두고 안 맞는 탱커가 있으면 파티가 집니다.

이 생각은 2주쯤 전에 시작됐어요. 한 회사가 왜 그렇게 사업이 어려운지 붙잡고 있다가, 거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가 무슨 문제를 푸는지 모른다는 걸 봤거든요.

당시 저도 사업은 돈을 버는 일이라고 믿고 있어서, 그게 왜 문제인지 한참 몰랐습니다.

03

사업체는 톱니바퀴 하나다

그날 저는 세상에 이미 정해진 톱니바퀴들이 돌고 있는 거 같다고 했어요.

그 바퀴 중에 아주 작은 하나라도 내 것이 되면, 세상이 날 살려 줍니다. 내 바퀴가 안 돌기 시작하면 그때 죽어요.

사업체를 이렇게 보면 할 일이 단순해집니다. 이미 돌아가는 큰 기계 어딘가에 내 바퀴를 끼워 넣고, 옆 바퀴를 실제로 돌리면 돼요.

옆 바퀴가 돌기 시작하면 돈은 그 맞물린 틈으로 지나갑니다. 어른들이 사업은 돈이 없어도 되고 돈이 흐르기만 하면 된다고 하던 말을 그날 처음 알아들었어요.

폴 그래햄이 「착하게 사세요」에서 창업 1년 차 구글이 광고도 없이 비영리 단체처럼 보였다고 쓴 것도 같은 얘기였습니다. 구글은 그때 이미 웹을 찾는 사람들의 바퀴를 돌리고 있었어요.

반대로 바퀴를 안 돌리면서 돈만 끌어오는 회사는, 힐러들이 자기도 같이 죽을까 봐 억지로 살려 두는 회사가 됩니다. 2주 전에 본 회사가 그 모습이었어요.

04

사람도 바퀴다

재표형은 이 얘기를 듣자마자 자기 얘기를 꺼냈어요.

형은 아직 제대로 만든 것도 없는데 주변에서 자꾸 살려 준다고 했습니다. 이미 자기 바퀴가 있는 잘난 사람들이 왜 날 챙기나 싶었는데, 형이 바퀴를 만드는 중이라서였나 보다고.

그 말을 듣고 이건 사업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요. 그때부터 사람 하나하나가 세상에 끼워진 바퀴로 보이기 시작했어요.

사업가랑 사기꾼 얘기도 이 틀에서 풀렸어요. 저는 능력으로 갈린다고 했는데, 형은 HP가 계속 들어오면 사업이고 끊기면 사기라고 고쳐 줬습니다. 옆 바퀴가 실제로 도는지가 갈림길이었습니다.

그날 저는 죽는다는 건 잊힌다는 거라는 옛말을 꺼냈어요.

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정의됩니다. 그러니 내 바퀴가 아무것도 안 돌리게 되는 날, 세상에서 나를 기억할 이유도 같이 없어져요.

재표형이 물었어요. 우리 다 잠깐 사회에서 역할 하나 하고 가 버리는 바퀴냐고.

빅토리아 여왕은 큰 바퀴였을 거고 저희는 작은 바퀴겠죠. 그래도 돌고 있는 동안은 다 같은 기계 안에 있다는 게 저는 좋았습니다.

05

정해진 궤적 같다는 느낌

살다 보면 삶에 궤적이 정해져 있는 거 같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.

저는 다른 길로 가 보려 할 때마다 비슷한 일로 다시 돌아왔어요. 저는 그 느낌을 오래 답답해했어요.

그날 그 느낌에 다른 이름이 붙었습니다.

톱니바퀴가 삶의 궤적이라면, 궤적에서 벗어날 때 세상이 끌어당기는 건 날 다른 바퀴랑 다시 맞물려 놓으려는 힘이고, 저는 그 힘을 세상이 해 주는 교정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.

재표형은 한참 말이 없었어요.

그러다 어릴 때부터 넌 뭘 해도 굶어 죽진 않겠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그 이유를 알았다고 했습니다. 형은 그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인 줄 알았대요.

형은 그게 신이 내려 준 안전장치였다고 했고, 굴레라고 생각한 게 해방감을 준다고 했어요. 저도 그 대목에서 울컥했습니다.

형한테는 이십대 초반에 삶에 균형추가 있다는 걸 처음 느낀 뒤로 제일 큰 충격이었대요. 삶에 우연은 없다는 말이랑 비슷한데, 훨씬 깊게 와닿았다고.

그래서 저는 그 정해진 것 같은 느낌이 고마워졌어요.

시스템이 저를 가두려고 있는 줄 알았는데, 제가 빠지지 않게 붙잡고 있었습니다.

06

속도와 맞물림

나 잘났다고 혼자 빠르게 구르면 옆 바퀴를 갈아 먹고 튕겨 나가요. 그날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.

재표형이 그게 모두에게 자기 속도가 있다는 말이냐고 물었고, 저는 기어비가 달라서라고 답했어요.

형은 예술가 얘기를 했어요. 사업가는 더 큰 사업으로 바퀴를 끌고 가면 되는데, 예술가는 맞물려 도는 사이클이 너무 커서 보상이 몇 세기 뒤에나 온다는 얘기였어요.

형은 자기 대에서 빛을 못 봐도 괜찮다고 생각해 왔는데, 그게 꽤 오만한 생각이었다고 했습니다. 큰 사이클에 물린 바퀴도 지금 이 자리에서 돌고 있으니까요.

형은 단톡방에서 왜 둘만 얘기하고 나머지는 배경처럼 느껴지는지도 물었어요. 그러다 큰 바퀴 하나랑 주변의 작은 바퀴들이 다 있어야 돌아가는 거라고, 둘만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이 제일 멍청한 생각이라고 스스로 답했습니다.

07

둘이 맞물려서 나온 생각

이 얘기도 바퀴 두 개가 맞물려서 나왔어요.

형은 통번역을 했고 외국어를 여럿 하고 철학책을 많이 읽습니다. 형이 아는 걸 꺼내면 제 직감이 말이 되어 나오고, 형이 그 위에 또 쌓고, 제가 또 얹었어요.

형은 자기가 지식 쪽에 있었고 저는 직관 쪽에 있었다고 했습니다. 그리고 예전에 이걸 왜 배워야 하지 싶던 공부들이 이런 순간에 쓰이려고 있었던 거 같다고.

08

그래도 적는 이유

그날 아인슈타인이 왜 통일장 이론에 빠졌는지 알 거 같았어요. 이렇게 하나씩 이어지니까 모든 걸 하나로 묶고 싶어집니다.

그런데 다 묶으면 죽어요.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.

그 대화가 의미 있었던 건 형이랑 제가 그 순간 마음으로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에요. 글로 옮기면 그 마음은 안전해지는 대신 조금 식습니다.

재표형은 그걸 아우라라고 불렀어요. 형은 스승을 만나면 너무 좋은 대화를 하는데도 녹음을 안 켠대요.

그래도 적기로 했습니다. 형 말로는 우리가 이걸 40%쯤 이해한 거고, 100%라고 믿으면 다음이 더 늦게 온대요.

다 묶으면 죽는다고 해 놓고 지금 이렇게 묶고 있네요. 일단 HP는 좀 흐르게 두겠습니다.